주변명소

길상사

2010년 3월 11일 타계한 법정 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스님이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낸 곳이다. 1980년대 말까지 ‘대원각’이란 이름의 요정이었던 이곳은 대원각 소유주인 고(故) 김영한씨가 법정 스님에게 이곳을 시주하면서 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김영한 씨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대원각 부지를 시주했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는 불도체험, 수련회 등의 프로그램과 미술대회, 콘서트 등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이 진행되어 도심 속 문화공간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정릉천

정릉 옆을 흐르는 하천, 꼬마 청계천 북한산 기슭 정릉 계곡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10.25㎞를 흐르다 동대문구 용두동 청계천 물줄기로 합쳐지는 정릉천. 청계천을 시작으로 성북천과 홍제천 등 강북의 다른 샛강들에서도 맑은 물이 흐르고, 물풀이 우거진 옛 모습을 찾는 복원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정릉천이 감싸돌고 있는 종암 2동은 모랫말 또는 모랫골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정릉천의 물이 맑아 빨래터로 이용되었고, 상류에서 내려온 모래가 쌓여 정릉천 주변은 언제나 모래밭으로 변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정릉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능입니다 처음 능지를 정한 곳은 안암동이었으나 산역(山役)을 시작할 때 물이 솟아나와 현재 중구 정동의 덕수궁 북서쪽에 능을 조성하였습니다. 신덕왕후는 황해도 곡산부 강윤성(康允成, 判三司事贈象山府院君)의 딸로 이성계와 만나 2남 1녀를 낳았고 태조 원년(1392)에 현비로 책봉되었으며, 태조 7년(1398) 8월 13일 판내시부사 이득분(李得芬)의 집에서 승하하였습니다. 사랑하던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너무 상심하여 슬퍼하다가 능터(陵地)를 친히 찾았습니다. 태조는 공신들의 주장대로 국모를 높이는 뜻에서 공신수릉제(功臣守陵制)를 채용하고 능역을 황화방 북원(皇華坊 北原, 현 정동)에 조영하였습니다. 그 동편에는 정릉의 원찰(願刹)로서 170여간의 흥천사(興天寺)를 세운 다음 자주 행행(行幸)하였고 경복궁에서 정릉의 아침 재 올리는 흥천사의 종소리를 듣고서야 수라를 들었습니다. 이 흥천사 종은 후일 종루(鐘樓)에 걸려 서울 장안의 시각을 알리기도 하였다가 현재는 덕수궁에 옮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정릉은 태종이 즉위하면서 푸대접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조선 건국 후 이방원(태종)이 건국 공신으로 왕위를 계승하고자 하던 차에 신덕왕후가 그의 소생 방석을 세자로 삼았으므로 증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덕왕후가 승하한 지 2년 뒤에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은 이복 동생 방번과 방석을 죽이고, 그의 형 방간과 싸워 이겨 왕위에 오르자 정릉을 눈에 가시로 여겼습니다. 이윽고 태조가 승하하자 이로부터 9개월 만인 태종 9년(1409) 2월에, 의정부에서 정릉이 유독 성 안에 있어서 미편(未便)하고, 중국 사신이 머무는 태평관이 가까우니 이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상소를 올렸으므로 동소문 밖 사을한리(沙乙閑里 :현 정릉)로 이장하였습니다. 태종은 능을 옮긴 지 한달이 지난 후에는 봉분을 깎아 버리고 정자각(丁字閣)을 헐어냈으며 석물(石物)들을 모두 땅에 묻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해 여름, 흙으로 만든 광교(廣橋)가 무너지자 12신상(十二神像) 등의 석물을 실어다 돌다리를 만들게 하고, 그 밖의 석재나 목재들은 태평관을 건립할 때 부속재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정릉은 돌보는 이가 없었으므로 능침이 황폐하여 아무도 신덕왕후의 능으로 보지 않았는데, 170년이 지난 선조때 신덕왕후의 후손인 강순일(康純一)이 군역 면제의 혜택을 받고자 조정에 소청하자 이를 계기로 정릉 위치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당시 아차산 일대 등을 모두 뒤졌으나 흔적이 없었는데, 조선 초 태종 때 변계량(卞季良)이 하늘에 제사 지낸 제문(祭文) 속에서 정릉에 관한 구절을 찾아내어 정릉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정릉 능침을 수봉(修封)하고 한식에 제사하는 것만으로 그쳤습니다. 그 후 현종 10년(1669)에 송시열(宋時烈)의 계청(啓請)으로 신덕왕후는 200년만에 비로소 종묘에 배향되고 능묘로 봉심(奉審)하기로 하였습니다. 또한 이경석(李景奭) 등의 계청으로 능을 수리하고, 재실(齋室)을 중건하여 수호군을 정해 주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능의 관리를 위하여 영(令) 1원과 참봉 1원을 두었습니다. 이 때에 현종은 10월 2일 교서를 발포하고 과거(科擧)를 특별히 설정하여 성대하게 경축하였습니다. 봉릉(封陵) 설재(設齋)하던 날에는 비가 정릉동 일대에만 많이 쏟아졌는데 그 당시에 주민들은 이 큰 비를 가리켜 억울한 원을 씻는 비라 해서 『세원지우(洗寃之雨)』라 하였다고 전합니다.